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농번기에는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천직인 농사일을 도와드렸지만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간 이후로 방학 때나 말로만이라도 도와드린 기억이 난다. 논에 모를 낸 다음 김매기가 끝나고 풀을 뽑는 ‘훔치기’할 때가 제일 싫었다.
벼가 자라서 벼 끝이 팔이며 목이며 얼굴이며 겨드랑이에 닿아서 그 깔깔한 끄트머리가 땀과 범벅이 된 살갗에 생채기에 피가 맺히기도 하고 따가워 며칠 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 때는 논이 없는 집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고 학교에서 중간고사나 시험이 있다고 하면 오지 말라 하셔서 논에 가지 않았다.
먹고사는 직장관계로 도시에 살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요즈음 흔히 쓰이는 말로 귀농귀촌을 했다. 논밭 가꾸는 농촌생활을 한 지 십여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많이 부족하고 눈에 설다.
생전에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농사는 하늘이 짓고 사람은 관리만 한다. 농사는 초기에 아무리 잘 돼도 나중에 낫을 대봐야 안다’고 하셨다. 십여 년 같은 농사를 했지만 변수가 많아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내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태풍, 비바람, 아니면 가뭄에 말라 죽고 뜻하지 않은 병충해까지 ‘정말 하늘의 뜻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평소 하늘을 공경하고 잘 모셔야하는데 과학이 어쩌고저쩌고 자연을 무시하고… 또 잘 몰라서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내 죄가 더 크다 말로만 반성해 보지만 실제로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소인배라 스스로를 질책해 본다.
부모님은 논밭에 가시면 벼나 채소 등 곡식을 사람 대하듯 그동안 잘 있었는지, 잘 자라고 있는지, 너는 왜 못 컸는지를 물어보고 혹시라도 일을 하다 곡식이 상하면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해 하셨는데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언제 철이 나서 곡식이나 동물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철들면 죽는다는데!!! 철(때)을 모르는(不知) 것이 철부지인데!!!
이전에 우리 집에는 일 소(일하는 소) 암소를 십여 년 이상 키웠다. 멍에를 매고 쟁기를 끌어 논밭을 갈고 써레질 하고 길마를 얹고 그 위에 발채를 묶어 두엄을 나르고 수확한 보리나 밀, 콩다발 볏다발을 날랐다.
1960년대 이후에 새마을사업으로 동네마을 길이 넓어지고 교량이 생기고 신작로가 생기면서 운송수단으로 소는 달구지를 끌며 사람을 한결 편하게 만들었다. 논밭으로 갈 때 빈 달구지를 타고 가는 낭만과 기분은 요즈음 자가용은 저리가라였고, 달구지가 없는 집 애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후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감소하고 소 대신 경운기가 등장하면서 이제는 일 소가 없어졌다. 논갈이 때 새참 막걸리 심부름 가다가 호기심에 술주전자에 입대고 한 모금 마시던 낭만과 아버님이 너도 한 잔 마셔라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일 소(일하는 소)를 만들려면 시장 쇠전에서 젖 떨어진 송아지를 구매해 어느 정도 키우다 코를 뚫고 소코뚜레를 채우고 굴레를 씌운 다음 고삐를 연결한다. 송아지가 중소가 되어 일을 부릴 때가 되면 목에 멍에를 씌우고 봇줄에 끙게를 매달고 무게가 나가는 물체를 올려 멍에를 씌울 자리에 굳은살이 배도록 길을 들인다. 처음에는 코뚜레를 잡고하다 어느 정도 길이 들면 고삐를 잡고 하는데 여러 날 평지와 오르막길, 내리막길에서 여러 번 훈련과 연습을 반복한다. 일소를 만드는 과정이다.
멍에를 씌운 자리에 굳은살이 배어야 논밭으로 가서 쟁기 갈기부터 한다. 어렸을 적에 끙게를 타는 재미도 참 좋았는데 이제는 사러진 옛일이 됐다.
이때 고삐로 가야 할 방향을 훈련하는데 고삐로 ‘이랴이랴’ 엉덩이를 치면 앞으로 가고 고삐를 잡아당기며 ‘이랴이랴’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고삐로 옆구리를 치며 ‘어뎌뎌뎌뎌뎌’ 하면 왼쪽으로 간다. ‘워워’하면 멈추고, 뒤로 물리고 싶을 때는 ‘물러물러’ 하고, 언덕배기를 차고 갈 때는 뒤에서 밀며 ‘이영차이영차’ 하면 힘차게 치고나간다.
우리가 기르던 소는 기특하게도 논배미 위치를 알아서 논갈이 할 논을 찾아갔다. 순하고 일도 잘했지만 암송아지보다 값이 더 나가는 황송아지를 많이 낳아 우리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집안의 경사였고, 자식들의 등록금이 됐고, 혼숫감을 마련해 줬고, 농지를 장만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소 한 마리가 논 열마지기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큰 자산이었다. 내 기억으로 소가 하루 일을 나가면 사람 이틀치 품삯을. 소와 달구지가 같이 나가면 사람 사흘치 품삯을 받았다고 들었다.
세월이 흘러 경운기, 트랙터가 늘어나면서 소의 일이 줄어들고 기르던 소가 나이도 들어 장에다 팔 때 나는 객지에 있었지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우리 가족으로 십여 년 이상 살아 모두가 섭섭해 했다. 동생들은 눈물을 흘렸고 소도 눈치를 채었는지 떠나기 싫어 외양간에서 나오지 않으려 뒷걸음질 치다 나오면서 끝내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예전에 ‘쇠전(우시장)’에서 소를 고를 때 입을 벌려 이를 보고 나이를 헤아리고 뿔의 모양과 엉덩이를 비롯한 뱃구레 등 체형을 살펴 중개인 ‘거간꾼’과 가격이 형성되면 돈으로 팔고 사거나 아니면 맞바꾸기도 한다. 아버님은 소를 잘 볼 줄 알아서 주변에서 요청으로 소를 보러 자주 우시장에 가셨고 멀리는 오산 우시장까지 가시곤 했다. 집에 오실 때는 얼큰하게 술을 한 잔 하시고 오셨다.
글쓴이 朴景濬 선생은 1952년생이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500년 역사의 화성 구장리 ‘밀성박씨집성촌’에서 출생했고 팔탄초, 발안중, 한양공고, 한양대 기계과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