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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땡볕 멀리 아스팔트 백리길 ‘기어간다’ 연작
기사입력: 2022/07/28 [20:19] 동네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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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석풍[木花石風]

지은이 목화석풍은 지난 18일부터 25일까지 오리역 인근~용산 국방부청사 40㎞ 구간을 여드레 기간 기어서 갔다. 그 매일매일 마음 속 지도에 그려지는 이정표들을 갈무리한 글이 ‘기어간다 연작’이다.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의 나이, 조만간 첫 손녀를 얻게 되는 나이에 무릎을 온통 버리면서 기어가야만 했던 그의 사정은 무엇일까? 문득 황지우 시인의 1980년대 시 ‘신림동 바닥에서’ 첫 문장을 떠올렸다

[편집자 ]

 

기어간다

 

아기는 기어가는 것이 로망이다

손에 닿을 거리라도 기어야 갈 수 있다

손과 발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

기어가는 순간 깨닫는다

 

기어갈 수 있을 때 가능한 먼 곳까지

가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래봐야 거실 안이 전부다

그래도 사방을 향해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팔이 움직이고 다리가 따라가나

다리가 밀어줘야 팔이 앞으로 갈 수 있나

운동의 제1법칙이 아기에게는 의지의 법칙이다

눈동자에게 가야할 곳을 지정받는 단순함으로 기어간다

 

2022. 7. 18 기어가기 첫날

 

기어간다

 

아스팔트 위로 달려야 하는 것들은 자동차이다

고단한 몸을 싣고 가는 버스

분주하게 달리는 승용차

그것이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적색불에 여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녹색불은 신호탄이 되어 달려간다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간다

지나간 인생의 절반은 아스팔트에 흔적으로 남긴다

 

차가 가야 갈 길에 사람이 기어서 간다

아스팔트에 악어가 기어가거나

우마차가 가면 신기하게 바라보겠지만

사람은 적색불보다 더 답답하게 본다

 

2022. 7. 19 기어가기 둘째 날

 

기어간다

 

양반다리 밑을 기어가는

흥선은 야심가이다

 

땡볕 아스팔트 길을 기는

원주민들은 투쟁가이다

 

후일

대원군이 되는 자와

피눈물 흘리는 자가 있다면

불공평한 것 아닌가

 

2022. 7. 20 기어가기 셋째 날

 

기어간다

 

복락원*을 꿈꾸는 자 기어간다

염원은 길에 뭍고

쉼 없는 반복을 계속 한다

 

한 치가 얼마나 긴 것인지

욕심을 길에 물으니 손바닥 크기로 가늠이 된다

 

복락원을 꿈꾸는 밀턴

길에 묻은 것들이

아무도 다니지 않을 때 새싹되어 솟아오르리

 

2022. 7. 21 기어가기 넷째 날

*복락원復樂園: 영국 작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년)의 서사시로 실락원(Paradise Lost)의 후속작. 사탄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사실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고행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임을 그리고 있는 작품

  

기어간다

 

땅에 있는 길이든

바다에 있는 길이든

하늘에 있는 길이든

 

다 임자가 있다

 

땅에서는 사람

바다에서는 물고기

하늘에서는 새

 

임자가 쫓겨난다

 

땅에서는 자동차

바다에서는 배

하늘에서는 비행기

 

새 임자들은 무정하다

 

기어가는 뭇 생명은 CO2로 질식한다

 

2022. 7. 22 기어가기 다섯째 날(어른 童詩)

 

기어간다

 

알을 빼앗긴 물떼새 마냥

둥지 주위를 맴도는

공기가 아프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고향의 추억을

길 위에서 주워보려 기어본다

 

사각진 아파트에 가둬둔 옛 땅의 자취

타르로 뭉쳐진 아스팔트 위에

혼으로 떠돌 뿐이다

 

강제라는 단어는

영혼까지도 순삭시킨다

강제수용은 몸과 마음 모두를 순삭시킨다

 

2022. 7. 23 기어가기 여섯째 날

 

기어간다

 

수몰되어 없어진 고향은

댐가 물 위에

아지랑이로 피어난다

 

산업단지에 넘어간 고향은

공장 굴뚝에

연기로 뿜어져간다

 

아파트로 빼앗긴 고향은

엘리베이터 오르내리는

기계음으로 울음소리를 낸다

 

2022. 7. 24 기어가기 일곱째 날

 

기어간다

 

길게 내쉬는 한숨소리

사연을 짐작할 길이 없다

포물선으로 날아간 한숨은

정적으로 되돌아온다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는 군상

행인은 그 누구도 묻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게지

 

게는 옆으로 기어도 빠르다

사람은 앞으로 기어도 게보다 느리다

그래서 한숨조차 슬퍼진다

 

2022. 7. 25 기어가기 여덟째 날

 

 

▲ 글쓴이 목화석풍[木花石風]은 향토시인으로 2020년 늦여름이던가 금주 선언 후 현재를 살고 있으나 한때는 경악(?)할 정도의 말술 애주가였다. 잠시나마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인연으로 당시 반복하던 주사(酒邪)라고 해야 하나? 취기를 빌려 얼큰하게 쏴주던 애송시가 있었으니 김소월의 ‘산유화’였다. 이 섹션은 그런 그가 들려주는 일상의 산유화 버전 ‘자소서’다. 주제/소재 가리지 않고, 장르 구분 없이 장강을 이루는 연작에 쫑긋 눈ㆍ귀를 세운다  ©동네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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